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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일지

수필 일지 - 네가 이 땅에 다시 서기까지 (完) 글, 그림 - 이목 (完). 마지막 밤, 그리고 헤어짐 무르익은 과실의 밀도(密度)와 같이 밤의 내부는 달도록 고요하다. -밤은 영향이 풍부하다- 김현승 조감독은 소년과 이전과 같이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소년을 데리고 장로에게 가지는 않았고 장로에게도 안내인 청년이 말을 해 두어서 그날의 소란은 해결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머무는 날의 마지막 날이 되자 장로는 안내인 청년에게 나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나는 약간 의아한 기분으로 장로의 거처로 갔다. 장로는 그날과 마찬가지로 근엄하고 지엄한 자태로 화려한 치장을 한 채 앉아있었고 안내인 청년이 그 옆에 앉았다. 나는 그와 마주 앉아 인사를 드 렸다. ‘이제 마지막 날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새로운 삶의 자세를 배웠습니다. 마을사람들에.. 더보기
수필 일지 - 네가 이 땅에 다시 서기까지 (9) 글, 그림 - 이목 9. 조화(調和)로 가는 길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조화(調和)로 가는 길’이라는 이름의 책이었는데 워낙 오래전에 읽었던 책이었기 때문에 저자의 이름도, 구체적인 내용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문장만은 기억이 난다. 아마 책의 끄트머리를 마무리하는 문자이었던 것 같다. 거기서 ‘진정한 조화로 가는 길은 험준한 산맥을 고독하게 올라가는 것과 같이 고통스럽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 길을 영원한 고통의 심화라고 생각하고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화로 가는 길 속에서 미쳐 그 끝을 보지 못한 채로 죽어간다. 왜냐하면 그 과정의 고통은 그들을 기만하기에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숙소 안에서 나와 조감독, 안내인 청.. 더보기
수필 일지 - 네가 이 땅에 다시 서기까지 (8) 글, 그림 - 이목 8. 타오르는 꽃과 같다 아직까지 장로는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심기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조감독이 제시하고 있는 사항은 그야말로 마른하늘의 날벼락과 같이 별안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자신의 마을의 소년을 지상으로 데리고 가겠다니, 장로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그는 이 마을의 영적인 수호자로서의 역할도 자처하고 있으니까. 조감독은 물러서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소년은 조감독에게도 장로에게도 시선을 두지 않고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안내인 청년은 나에게 신호를 주었다. 그도 지금 이 순간이 그다지 달갑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장로의 편에 서기보다도 중립적인 역할로서 그들을 대하고 있었기에 같은 동류에 .. 더보기
수필 일지 - 네가 이 땅에 다시 서기까지 (7) 글, 그림 - 이목 7. 장로 마을의 장로는 산의 마을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 영매이자 정신적인 지주역할도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청동기 시대의 족장이 거칠 듯한 투박하면서 날카로워 보이는 위압적인 치장을 하고 있었고 긴 백발은 양 갈래로 묶어서 장식하고 있었다. 두 눈은 주름으로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아 언뜻 보면 눈을 감고 있는지 뜨고 있는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나는 그가 몇 살일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의 주름살은 얼굴에 격렬한 세월의 파문을 그리고 있었으나 신비적이고 특별한 힘이 정말로 그에게 작용하고 있는 건지 이상하게도 그를 마주하고 있을 때에는 그에게서 그 어떤 노화적인 쇠퇴의 현상이나 반응을 보지는 못했다. 그래서인지 장로를 대할 때는 마을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조차도 괜스.. 더보기
수필 일지 - 네가 이 땅에 다시 서기까지 (6) 글, 그림 - 이목 6. 조감독과 소년 어떤 사람을 잘 안다는 것-잘 아는 체한다는 것이 그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무척 불행한 일이다. 우리가 비난할 수 있고 적어도 평가하려고 드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에 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진기행- 김승옥 조감독은 소년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리고 소년과 함께하는 시간이 점차 많아졌다. 촬영을 할 때를 제외하면 그는 소년과 함께 이곳저곳에서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오랜만에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있었고 한 손에는 만년필이 또 한 손에는 노트를 들고 소년에게 스케치를 보여줬다. 넝쿨처럼 자란 초록빛의 식물이나 독특하고 이국적으로 느껴지는(우리에게는) 집들을 하나씩 러프하듯 스케치하며 소년에게 그림이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에 대해서 착실하.. 더보기
수필 일지 - 네가 이 땅에 다시 서기까지 (5) 글, 그림 - 이목 5. 촬영 촬영하면서 우리는 쉴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그들에게 손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점이기에 나는 팀원들, 특히 신입한테 거듭 주위를 요했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여러 번 교육을 했지만 일상적인 부분들 중에서는 의식의 끈을 잡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실수를 할 수 있다. 무의식의 작용이 무서운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끔찍한 실수를 범할 수도 있다는 것. 나는 신입에게 겁을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때로는 강도 높은 주의로 환기함으로써 사전에 실수를 방지하는 것도 내가 이 일을 하면서 나름 중견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난 뒤 깨달은 방식 중 하나였다. 그래서 신입은 나를 대할 때 군기가 바짝 든 이병처.. 더보기
수필 일지 - 네가 이 땅에 다시 서기까지 (4) 글, 그림 - 이목 4. 조감독과 나 아침부터 조감독은 그림을 그리는 소년을 찾고자 했다. 그는 나에게 어제 사진으로 보여준 그림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나는 그 그림은 이미 지워져서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조감독은 내 말에는 신경 쓰지 않고 알려달라는 말을 거듭해서 우리는 함께 안내인 청년이 어제 안내했던 우물 근처로 향했다. 아침의 마을은 고요한 안개에 휩싸여 있었고 마을 옆의 높은 산봉우리에도 거대한 안개가 두 팔을 벌리고 산을 안고 있었다. 산에는 항상 안개가 붙어 있었으므로 이곳에 온 지 꽤 시간이 지난 우리에게는 그저 평범한 광경처럼 익숙해져 있었다. 사실 조감독과 나는 일반적인 신기하다거나 진기하다고 인식되는 풍경이나 현상에 대해서 익숙해져 있었다. 그.. 더보기
수필 일지 - 네가 이 땅에 다시 서기까지 (3) 글, 그림 - 이목 3. 그림을 그리는 소년 일주일간 우리는 마을 사람들과 교섭했다. 그들에게 우리가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익숙함이 친밀함을 만들 듯이 우리는 그들과 함께 다양한 일들을 하고 그들에게 선물을 주기도 하며 그들의 호의를 사기 위해서 노력했다. 조감독도 최대한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대했다. 그는 거의 웃음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필요한 웃음이 아닌 이상 누군가에 웃음을 짓지 않았다. 나는 마을을 관찰하면서 나름대로 마을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밑에 있는 산에 내려가서 열매를 따거나 목재를 구했다. 하나의 공동체로서 노동하였고 그래서인지 마을 사람들은 군중이라는 느낌보다도 하나의 거대한 가족과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실제로 마을 사람들은 서..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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