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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수필일지

수필 일지 - 네가 이 땅에 다시 서기까지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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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그림 - 이목

 

 

 

 

 

(完). 마지막 밤, 그리고 헤어짐

 

무르익은 과실의 밀도(密度)와 같이 밤의 내부는 달도록 고요하다.

-밤은 영향이 풍부하다- 김현승

 

조감독은 소년과 이전과 같이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소년을 데리고 장로에게 가지는 않았고 장로에게도  안내인 청년이 말을 해 두어서 그날의 소란은 해결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머무는 날의 마지막 날이 되자 장로는 안내인

청년에게 나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나는 약간 의아한 기분으로 장로의 거처로 갔다. 장로는 그날과 마찬가지로

근엄하고 지엄한 자태로 화려한 치장을 한 채 앉아있었고 안내인 청년이 그 옆에 앉았다. 나는 그와 마주 앉아 인사를 드

렸다. ‘이제 마지막 날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새로운 삶의 자세를 배웠습니다. 마을사람들에게서, 그리고 이곳의 자연에서.’ 장로는 내 말을 가만히 들었다. 그러다가 ‘ 당신들은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살짝 당황했지만 비스듬히 비쳐드는 햇빛의 안온한 빛 덕분에 긴장을 풀고 답할 수 있었다. 장로의 그러한 질문을 들으니 마지막이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계속해서 평면으로만 보던 것이 갑자기 입체화가 되어서 나에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저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러한 삶을 지속할 겁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지혜를 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비장하게 답했다. 그러자 장로는 ‘ 당신들의 행로에 평안과 희망이 가득하길 빕니다.’라고 힘을 주어서 말했다. 그 말의 끝은 형언할 수 없는 여운이 가득했고 과실의 부드럽고 달콤한 향 같은 것이 느껴지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감복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야말로

영적인 말이었다. 다른 이가 하는 일반적인 말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영매이자 마을의 수호자로서 지낸 시간의 강도를 견뎌낸 노인의 한마디에는 마을의 전부가 담겨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이 마을의 사람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남자. 그 남자의 말의 힘에 나 역시도 의존하게 되었다. 그 순간만큼은 나도 마을사람이었다. 장로는 안내인 청년에게 무언가 속삭였고 웃음기를 머금은 안내인 청년은 뒤편에서 바구니를 꺼냈다. 바구니에는 과일(산의 마을 사람들이 즐겨 먹는 다소 특이하게 생긴 과일이다)과 고유의 문양으로 장식한 목걸이 같은 것들이 있었다. 안내인 청년을 이것을 나에게 건네주면서 ‘장로께서‘

보답으로서 드리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놀래서 안내인 청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지만 그는 웃기만 할 뿐 말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거부하려고 했으나 장로의 영험한 말로써 영적인 힘을 경험한 나는 그의 의사를 존중하기 때문에

그의 선물을 받아서 숙소로 갔다. 숙소에는 신입 팀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장로의 바구니를 보여주었고 그는 신나 보였다.. 그는 나에게 ‘이번 촬영을 통해서 정말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감독님께는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물론

조감독님 께도요’라고’ 말했다. 나는 웃으면서 들어가자고 했고 우리는 함께 들어갔다.

그로부터 시간은 빠른 속도로 지나가서 땅거미가 지고 어느새 하늘은 어둠으로 가득 찼다. 마을은 그 어둠의 품에 안겨

있었다. 한 치의 불편함이나 불쾌함도 없이 고요하게 결정지어진 밤의 안락한 품 안에서 마을은 여느 때라 달라진 것 하나 없이 각자의 수면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우리들도 마지막인 만큼 푹 자자는 심정으로 별도의 이야기꽃을 피운다거나

하는 소란을 지양하고 일찍 잠이 들었다. 워낙 고된 일을 하는 터라 팀원들은 나의 그러한 심심한 결정에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그들은 금방 잠에 들었고 나와 조감독은 한 자리에 누워서 똑같이 천장의 어둠을, 밤을 응시했다. 잠이 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잠을 자려고 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조감독은 잠을 자려고 하지 않았다. 조감독은 말했다.

‘아까 소년과 인사를 나눴습니다. 소년은 눈물을 흘렸지만 나는 그에게 그림을 하나 그려줬어요. 작은 새를 그려줬는데

좋아하더군요. 눈물도 그치고....’ ‘무슨 새를 그렸죠?’ ‘독수리였던 것 같습니다.’ ‘독수리..... 그렇군요.’ 독수리..... 그렇군요 ‘마지막 밤이라서 그런지 유독 더 조용한 것 같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될까요?’ 나는

웃었다. 조감독을 나를 봤다. 나는 ‘무엇을 하든 잘 될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장로가 축복을 빌어줬으니까

말이죠. 그는 영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 그래요. 그래요. 그렇게 생각합시다’ 그렇게 우리는 잠이 들었다. 참으로

콤한 잠이었다. 그동안의 마을에서의 생활들이 이 밤 속에서 함께 녹아버리는 느낌이었다. 달콤한 과실과 같은 잠.

아침은 추웠다. 차가운 공기가 우리를 함께 배웅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의 입구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서 안개가 기승을 부렸지만 마을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우리를 향해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앞에는 장로도 있었다. 나는 장로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팀원들 중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신입도 뭉클한 마음이 있는지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는 모습을 보였다. 조감독은 소년과 인사를 나누고 나는 마지막으로 장로의 손을 맞잡고 작별인사를 했다. 마을 사람들의 소리가 덩어리가 되어서 환희로 가득 찼다.. 그 환희의 내부에서 우리는 작별을 했다. 안내인 청년만은 산 밑까지 우리를 안내하기로 해서 마지막으로 동행했다. 나는 그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뭉클함과 함께 눈 안쪽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멀어지는 마을 사람들을 뒤로하고 우리는 밑으로 내려갔다. 점차로 멀어지는 마을의 입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슬픔이 느껴져서 뒤는 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조감독도 우울한 낯빛을 하고 있었다. 안내인 청년은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그도 우리에게 정이 많이 든 건지 이따금씩 푸른빛이 얼굴에 감돌았다.

특정 부분에 도달하자 안내인 청년과도 헤어지게 되었다. 안내인 청년은 우리가 마지막으로 작별하게 되는 마을 사람이었다. 팀원들은 각자 그에게 인사를 했고 나도 인사를 했다. 나는 그와 마지막으로 포옹을 나누었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는

우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면서 지켜봤다. 이제 마을의 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주변은 온통 나무와 안개뿐이었다. 한참을 내려가니 지상의 마을 사무실 쪽 사람이 차를 몰고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차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마침내 지상의 땅을 밟게 되었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이 감촉. 중력을 다시금 느끼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2주일간의 산의 마을에 대한 촬영은 그렇게 끝이 났다. 우리는 이곳에서 많은 것을 경험했고 배웠다. 돌아온 나와 조감독은 다큐멘터리를 완성했다. 제목은 조감독이 지었다. 원래는 다큐멘터리(인간과 환경의 조화와 삶, 그리고 아이러니)라는

이름이 정해져 있었지만 그는 나에게 ‘이번 다큐멘터리를 편집하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역시 그림을 그리던 소년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그의 삶이 이 작품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의 기질과 상반되는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그것 또한 그의 삶의 일부로서 분명하게 존재하며 그가 일어서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는 언젠가 스스로

일어설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저는 다시 한번 그 마을을 방문하여 소년에게 물을 것입니다.’

이후, 우리가 촬영한 다큐멘터리는 총 2부작으로 교육방송국에서 방영되었다. 제목은 이러했다.

(네가 이 땅에 다시 서기까지).

 

 

2023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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