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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수필일지

수필 일지 - 네가 이 땅에 다시 서기까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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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그림 - 이목

 

 

 

 

5. 촬영

 

촬영하면서 우리는 쉴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그들에게 손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점이기에 나는 팀원들, 특히 신입한테 거듭 주위를 요했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여러 번 교육을 했지만 일상적인 부분들 중에서는 의식의 끈을 잡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실수를 할 수 있다. 무의식의 작용이 무서운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끔찍한 실수를 범할 수도 있다는 것. 나는 신입에게 겁을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때로는 강도 높은 주의로 환기함으로써 사전에 실수를 방지하는 것도 내가 이 일을 하면서 나름 중견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난 뒤 깨달은 방식 중 하나였다. 그래서 신입은 나를 대할 때 군기가 바짝 든 이병처럼 행동할 때가 있었다. 그것을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지금으로서는 그런 다소 비일상적인 행동이 도움이 될 터였다. 그리하여 나도 그것에 대해서

제재를 하지 않았다.

이번 다큐멘터리의 주제는 ‘인간과 환경의 관계’였다. 인간이 주어진 환경에 따라서 어떻게 변모하고 반대로 환경은 인간에 따라서 변화하는지에 대한 방대한 이야기를 담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별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삶을 조사할 필요가 있었고 한동안 선물들로 가득하여 정리되지 않은 서랍장과도 같은 몇 칸짜리 작업실에서 밤새 다양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공부를 했다. 그러던 중 눈에 띈 곳이 바로 이 산의 마을이었다. 비일상적이라 여겨지는 공간에서 사는 존재들, 이들에 대한 관심이 비대해짐에 따라서 나는 펜을 통해서 노트에 러프라고 할만한 다큐멘터리의 기획을 필기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소 무모하다고까지 생각할 정도로 나는 확신에 차서 노트를 적어나갔다. 그런 다음에 작업실에서 나와서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산의 마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팀을 꾸린 것이다. 당시 풍화된 자료사진으로 본 마을의 모습을 보고 나는 초현실적인 회화를 떠올렸다. 그런데 막상 이곳에 와서 현지의 사람들과 직접 마주하여 다양한 체험들을

하다 보니 결국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어떻게 보면 자명하기 그지없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긴 늘 이런 식이었다. 우리는 신비주의적인 관점으로 낯선 사람들의 행태를 지켜보고 그들을 판단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삶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비슷하다는 느낌보다도 그저 같은 사람으로서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분명해서 줄곧 품어왔던 신비감은 순식간에 기화되어 버린다. 이들은 친절하고 개인적으로 호감이 들었다. 특히 안내인 청년은 믿음까지 갔다. 안내인 청년은 마음 사람들과 우리들 사이에 가교가 되어주었고 덕분에 사람들의 인터뷰와 정보수집을 원활하게

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앞으로 2주일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이 2주일의 시간 동안 2부에 해당하는 파트를 찍어야 한다. 1부는 우리가 이곳에 오기까지 착실히 촬영했다. 그러니까 구조상으로 정리를 하면 1부에서는 우리가 이곳에 오기까지를 담은 파트이고 2부는 그리하여 목도하게 된 장소에서 우리가 원했던 결과를 도출해 내는 파트였다. 나와 조감독은 능숙하게 팀원들을 지휘하여 촬영을 했고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던 설계도대로 효율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나는 다큐멘터리를

찍기 전에 미리 원고를 쓰는데 이는 조감독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둘은 서로가 주제를 정하고 그것에 맞는 각자의 글을 쓴 다음에 토론을 했다. 그리고 원고를 통합하여 필요한 것들을 추출하여 정리했다. 그런 방식들이 노하우가 되어서 지금은

효율성을 극대화시켰다. 팀원들은 그런 우리를 동경에 찬 눈으로 보기도 하였고 몇몇은 나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일부로 지원을 한 경우도 있었다. 신입도 그런 식으로 지원해서 합류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와 조감독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영상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고 그에 걸맞은 정공을 선택하여 이곳에 온 청년이었다. 그래서 기술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그에게는 가르칠 것이 없었다. 지나치게 겁을 먹는다는 것이 걸렸지만 조감독은 ‘나도 어렸을 때에는 그랬는데 당신도

그러고’라고 말하면서 그의 지원서를 나에게 한번 더 보게 했다.

아이들을 촬영하는 부분에 이르자 조감독은 그림을 그리는 아이를 찾으려고 했다. 나도 내심 궁금한 마음이 들어서 안내인 청년에게 물어보자 안내인 청년은 손가락을 저 멀리 작은 소년 한 명을 가리켰다. 나는 그 소년에게 다가갔다. 내가 다가가자 소년은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봤다. 소년은 처음 봤을 때처럼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꽃을 그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산도 있었다. 나는 웃으면서 소년을 바라보자 소년도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림을

가리키면서 감탄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고 그러자 소년은 돌멩이를 들어서 똑같은 꽃을 하나 더 그려냈다. 다시 봐도

훌륭한 손짓이었다. 그림을 그릴 때 소년의 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고 그래서인지 소년의 손에서 손으로 이어지는 선은 부드럽게 뻗어갔다. 나는 그 이전에 조감독에게 그림에서 선을 예쁘게 그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에 대한 설명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설명을 기억해 내자 소년의 고운 선이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한순간 나는 소년의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감정을 느꼈다. 눈치를 챘을 때는 조감독이 소년에게 밀착해서 소년에게 무언가 말을 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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