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그림 - 이목
6. 조감독과 소년
어떤 사람을 잘 안다는 것-잘 아는 체한다는 것이 그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무척 불행한 일이다.
우리가 비난할 수 있고 적어도 평가하려고 드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에 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진기행- 김승옥
조감독은 소년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리고 소년과 함께하는 시간이 점차 많아졌다. 촬영을 할 때를 제외하면 그는 소년과 함께 이곳저곳에서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오랜만에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있었고 한 손에는 만년필이 또 한 손에는 노트를 들고 소년에게 스케치를 보여줬다. 넝쿨처럼 자란 초록빛의 식물이나 독특하고 이국적으로 느껴지는(우리에게는) 집들을 하나씩 러프하듯 스케치하며 소년에게 그림이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에 대해서 착실하게 설명을 했다. 그 모습을 소년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조곤 하게 감상했고 말도 하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보면 언어의 벽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언어라는 것이 다르게 적용했었다. 그림이라는 언어로서 그들은 열렬하게 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그들에게는 서로에게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대화이리라.
촬영이 시작되고 일주일이 지났다. 사람들의 인터뷰를 정리했고 아이들과 마을의 풍경들을 사진과 영상에 고스란히
담았다. 이제 남은 일주일 동안은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나와 팀원들은 굉장히 바빠졌고 조감독도 마찬가지로 할
일이 많았다. 그러나 그런 바쁜 정리를 하던 도중에도 조감독은 소년과의 우정을 쌓아갔다. 나는 그 광경이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아는 조감독의 성정이랑은 완전히 상이한 행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감독은 절대로 아무리 호감이 가는 상대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나칠 정도로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다가가기 이전에 고심의 고심을 더하지 않으면 애초부터 다가가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번에는 친근하게 먼 소년에게 웃으며 다가갈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을 보면 나는 정말로 내가 조감독에 대해서 온전히 알고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이 들었다. 오랜 세월 함께하긴 했지만 내가 정말로 조감독의 세세한 부분까지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그저 일부분만을 전체로 오해하고 있지는 않을까. 누군가에 대해서 결론을 짓는다는 것은 결국 대상이 일부만을 전부로 착각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나는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그들의 친밀한 교류를 지켜봤고 나날이 지날수록 둘 사이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져서 누군가가 개입하기조차 힘들 지경이 되었다. 조감독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 아이는 이곳에 있기보다 좀 더 넓은 곳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러면 나는 ‘음...... 그렇게 생각할 수는 있지만......’이라고 적당한 대답을 하지 못했는데 조감독은 그것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만약 이 소년을 이 마을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보내면 어떨까? 그러니까 내 말은 도움을 주겠다는 의미로써 하는 말인데...?’라고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 나는 표정을 바꾸어서 그건 무리일 것 같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장로를 한 번 만나봐야겠다고 조감독은 나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조감독은 확신을 가진 것 같았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확신? 혹시 조감독은 이 소년을 지상으로 데리고 갈 생각인가. 갑자기 불안이 생겨났다. 나는 조감독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조감독은 내 말의 뜻을 잠시 생각하다가 ‘그 소년은 이곳에 있기보다 좀 더 그 소년에게 충만한 환경에
있어야 합니다. 그림을 봐서 알겠지만 그 소년에게는 엄청난 재능이 있어요. 그 재능은 쉽게 얻을 수 없고 또 얻어지지도
않는 재능입니다. 그러니 나는 더욱 절실한 마음으로 그 소년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소년에게는
높은 고도의 맑은 하늘의 공기보다 화실이 필요합니다. 충분한 화구들이 갖추어진.’ 불안함은 내 마음속에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말을 듣고 내가 왜 불안감에 시달리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직감적으로 떨림이 느껴졌다. 그는 이 일로
말미암아 장로를 만나고자 희망했다. 이때 나는 조감독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 이전까지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눈빛이었다.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지만 그 아이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 않나요? 그 아이가 원하지 않을 수도 있고.....’ ‘괜찮아요. 이건 기회입니다. 삶에서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아요. 만약 우리가 이 아이를 보지 못했거나 혹은
이곳으로 오지 않았다면 지금 이런 기회를 만들지도 못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소년에게도 이 기회를 잡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 장로에게 말해서 소년을.....’ ‘예. 소년을 지상에 내려 보낼 겁니다.’ 그리고 그는 안내인 청년에게
부탁하여 장로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상황이 급격하게 변하고 불안이 실체화되는 것 같다는 감정이 식은땀처럼
내 등을 적셨지만 그렇다고 이상하게 뭐라고 불쾌함을 표현하고 싶지는 않았다. 왜 그런 것일까. 조감독에 대한 이해의
부족함을 느끼고 나 자신이 죄의식을 느껴서일까. 나는 조감독이 안내인 청년과 함께 장로에게 가는 동안 홀로 카메라를
만지기만 하고 있었다. 달리 어떤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아마 장로는 완강하게 거부하겠지. 그러나 만일 하나라도 그가 허가한다면 그 소년은 조감독의 말대로 기회를 얻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로 그것이 소년이 기회일까. 기회가 축복이자 행복의 약속이라고 감히 누가 속단할 수 있을까. 나는 내 노트를 꺼내서 한참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예전에 어느 책에서
본 사자성어 하나가 떠올라 펜을 집어 들고 적어나갔다.
급전직하(急轉直下)
'일지 > 수필일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필 일지 - 네가 이 땅에 다시 서기까지 (8) (28) | 2023.04.10 |
---|---|
수필 일지 - 네가 이 땅에 다시 서기까지 (7) (32) | 2023.04.09 |
수필 일지 - 네가 이 땅에 다시 서기까지 (5) (22) | 2023.04.07 |
수필 일지 - 네가 이 땅에 다시 서기까지 (4) (22) | 2023.04.05 |
수필 일지 - 네가 이 땅에 다시 서기까지 (3) (26) | 2023.04.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