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그림 - 이목
4. 조감독과 나
아침부터 조감독은 그림을 그리는 소년을 찾고자 했다. 그는 나에게 어제 사진으로 보여준 그림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나는 그 그림은 이미 지워져서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조감독은 내 말에는 신경
쓰지 않고 알려달라는 말을 거듭해서 우리는 함께 안내인 청년이 어제 안내했던 우물 근처로 향했다. 아침의 마을은 고요한 안개에 휩싸여 있었고 마을 옆의 높은 산봉우리에도 거대한 안개가 두 팔을 벌리고 산을 안고 있었다. 산에는 항상 안개가 붙어 있었으므로 이곳에 온 지 꽤 시간이 지난 우리에게는 그저 평범한 광경처럼 익숙해져 있었다. 사실 조감독과 나는
일반적인 신기하다거나 진기하다고 인식되는 풍경이나 현상에 대해서 익숙해져 있었다. 그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는 그런 것을 포착하고 관찰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지금도 그 일들의 연장선상에 불과할
뿐이니까. 조감독은 분명 그렇게 생각할 것이었다. 새로운 지역으로 가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현상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일상적인 것에 불과할 것이라고.
우물 근처에 다다르자 그곳에서 한 여인을 만났다. 그 여인은 우물물을 퍼올리고 있었고 우리와 마주치자 깜짝 놀라서 움찔했지만 그들도 우리에게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지 인사하는 의미로 가벼운 미소를 짓고는 그대로 어디론가 갔다. 조감독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그림은 보이지 않았고 나도 그림을 찾지 못했다. 그림은 지워져 버린 것이다. 이에 조감독은 ‘음... 하긴 돌멩이로 그린 것이니까..’라고 말하면서 무심하게 굴었지만 내심 실망한 것 같았다. 그는 ‘어서 빨리 그 그림을 그린 소년을 보고 싶네요.’라고 말했다. 나도 동감한다고 답했다. 그리고는 우리는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걸었다. 걸으면서 그와 함께했던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우리 둘은 고등학생이었다. 그때는 우리 둘에게 지금과 같은 공통된 목표라거나 방향성이 없었고
상이한 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그림을 그렸고 나는 운동을 했다. 그러나 우리 둘 다 대학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았다.
내가 운동을 한 이유는 입시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나 자신의 몸을 단련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고 그도 미술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린다기보다는 그저 어렸을 때부터 줄곧 그려왔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다른 우리가 어떻게 친해졌는지 가끔씩 생각해 보면 신기한 지점들이 많고 의심이 가는 부분들도 적잖아 있지만 이미
친해진 후부터는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우리는 함께 토론을 하고 여러 주제들을 이야깃거리로 삼으면서 많은 시간들을 대화를 하면서 보냈다. 학교에 있을 때에도 집에 있을 때에도 우리의 대화는 식을 줄을 몰랐고 시간이 흘러 어느덧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그 대화의 기다란 흐름은 여전히 이어졌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서로 분야가 달랐다. 그래서 그는 미술대학교에 가게 되었고 나는 체육대학에 가려고 했으나 그 결정의 교차로 바로 앞에서 선로를 변경하여 일반대학에 진학했다.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으나 나름 학원을 꾸준히 다니면서 학업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기에 다행히도 시간의 공백기를 맞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학에 다니면서 뭔가 마음속에
심상찮음을 느끼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그것은 한층 더 강해졌다. 알 수 없는 거북함과 현기증과도 같은 막막함이 나의 머릿속으로 침투하여 무력감과 실증을 불러일으켰다. 그러자 학교의 수업들이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 무가치한 것처럼 여겨졌다. 왜일까. 나는 여러 번 자문해 보았지만 답을 얻지도 못한 채로 계절이 지나고 또 지났다. 그동안 미술대학에 다니던 조감독 역시도 신경증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는 나와 통화를 하면서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제대로 된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투덜대듯이 말했다. 그러면서 최근에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는 노릇이라고도 말했다.
한 학년이 지남에 따라서 나는 군대에 입대했다. 군대는 내 삶에서 가장 비자유적이고 고통스러운 시절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충분한 사유의 시간이기도 했다. 군대에서의 어느 날 밤, 꾸었던 꿈이 하나 생각난다. 꿈속에서 나는 붉은빛으로 가득한 지평선 아래에서 홀로 서 있다. 하늘에는 은하수가 언 듯 보이지만 아직 완전한 밤이 찾아오지는 않았기 때문에 별들은
희미하게 보이고 먼 지평선 너머에는 수백 마리의 얼룩말들이 달리고 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본다. 내 뒤에는 거대한
코끼리들의 행렬이 있고 그 사이사이로 작은 새들이 어슬렁거린다. 나는 이번에는 아래로 보았다. 내 발치에는 작은 개미들이 자신들보다 수십 배가 커다란 곤충을 옮기고 있다. 그 순간, 나는 유한성과 무한성, 거대함과 미세함, 생명과 죽음을
한순간에 느꼈다. 무엇보다도 자유롭게 그것들을 하나하나 모두 포착할 수 있었다. 그 황홀경과 같은 순간이 다음 순간으로 넘어가려는 찰나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숨은 거칠어 있었다. 차갑고 투박한 창문과 주변
사내들의 무신경한 숨소리가 무정하게 들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금 눈을 감고 방금 꾸었던 꿈으로 들어가 황홀경의 순간
속으로 빠져들려고 했지만 무리였다. 끝내 나는 잠을 자지도 못한 채 불면에 시달리면서 여명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 뒤로 나는 어떠한 순간들,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상관없이 찰나의 순간들을 포착하고자 하는 욕망이 생겼다. 새로운 꿈이 생기자 그전에 느꼈던 우울감은 천천히 사라져 갔다. 욕망이 강해질수록 후회의 쓰라림 또한 옅어졌고 싱글싱글한 생동감이
몸과 마음을 뒤흔드는 것 같았다. 아직 군대에 있었지만 그러한 생동감을 나를 움직이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나는 사유를 계속했다. 제대할 할 날이 다가오면서 사유의 끈은 더욱 질겨지고 강해졌다. 마침내 제대의 순간이 왔을 때 나는
품었던 꿈을 구체화시켰다. 그렇게 나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고자 마음먹었다.
집에 오자마자 나는 빠르게 실행시켰다. 조감독에게 함께 하자는 말을 건 것도 그 직후였다. 조감독은 처음에는 의아해
보였고 어리둥절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강하게 그에게 밀어붙였다. 그러자 그도 처음과 다르게 갈피를 잡은 듯 진지하게 회답했다. 이후 오고 가는 셀 수 없는 대화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함께하게 되었다. 그림 그리는 일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있던 그였기에 새로운 감각에 색다른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복무를 마친 뒤 나와 함께 처음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우리는 삶의 끝자락에 선 사람들 중에서 모종의 이유로 다시금 삶을 살아가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당신의 구원자들)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그다음에 우리는 이것을 방송국 공모전에 제출했고 거기서 당선이 되어서 다음 다큐멘터리의 제작비를 지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어느새 직업을 얻었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함께하고 있다. 나는 앞서 걷는 그의 뒤를 바라본다. 그는 과거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든다.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서 조금 더 잠을 자고 일어나서 본격적으로 팀원들과 함께 첫 촬영을 계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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