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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수필일지

수필 일지 - 풀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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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숲

 

 순간 섬광이 일더니 천둥소리가 하늘에서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잠이 깬 남자는 짜증이 났는지 머리를 기대로 있던 베개를 한쪽으로 던지고 미간에 인상을 찌푸렸다.

방 안은 어둠에 휩싸였기 때문에 신경질적인 남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히스테릭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창밖에서는 거친 빗소리와 창문 유리를 타고 흐르는 빗물이 밤의 고요한 적막 속에서 

조용히 끓고 있는 주전자 소리처럼 남자의 귀에 생생히 들려왔다.

그는 잠을 방해받고 다시 잠을 청하려면 잠이 멀리 날아간 즉시 그의 머릿속에 침투하는

수많은 상념들을 상대로 엄청난 집중을 요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종종 불면증에 시달리는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임을 본인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평소의 그였다면 자신의 잠을 빼앗아 버린 요인(要因)에 대해서 신경질을 부리고 더 나아가서는

분노마저 느낄 테지만 창을 두드리는 빗방울들의 행렬이 그다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심란해진 자신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고 있음을 느꼈다.

회사의 사정으로 많은 업무들을 하면서 몸도 마음도 지친 그에게 이 빗방울들의 밤의 행렬은 

낙하(落下) 하는 전몰자(戰歿者)가 아니라 천천히 다가와 고개를 숙이고 안정적이게 평온을 전달하는

전령(傳令)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머릿속을 이리저리 어지럽히던 날카로운 상념들은 어느새 하나둘씩 전령이 보낸 

평온에 의해서 반격당하고 격파당해서 마음속에는 안온한 평화만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에게는 참으로 신기하고 이상한 감정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아침에 눈을 뜨고 커튼 사이로 보이는 빗줄기가 흐르는 걸

보면 불쾌함이 먼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빗소리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빗소리는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소음과 다를 바가 없었기에 그는 집에서나 회사에서나

빗소리를 들으면 집중력이 낮아지고 금방 지쳐버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혀 그렇지 않고 기분 좋은 감정이 들었다. 

톡 톡 빗방울은 여전히 창밖에서 남자에게 귀를 간질이며 속삭이고 있었다.

그것이 유쾌해서 이제는 더 이상 자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흐르는 물줄기의 리듬에 맞추어서 다리를 편하게 뻗고 양팔을 가지런히 놓고 

머리는 한쪽으로 던져두었던 베개를 다시 들어서 기대었다.

그는 눈을 감고 오로지 어둠 속에서 고스란히 들리는 빗소리에만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때 현실에 지쳐 잠시 잊고 있었던 작은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그 기억은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기둥 같은 버팀목이었는데 그것은 그가 아주 어렸을 적에 

있었던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죽지 않고 살아서 그의 마음 한편에 남아있었다.

그 기억은 바로 풀숲에 관한 기억이었다.

아주 어렸을 적, 그는 가족들과 함께 계곡에 캠핑을 간 적이 있었는데 물 공포증이 있었던 그는

물에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어서 하염없이 다른 이들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기분이 잔뜩 상한 그는 어딘가로 가고 싶은 기분을 충동적으로 느꼈고 자신보다 크게 자란

여름의 풀잎들을 헤집고 풀숲으로 나아갔다.

그리고선 가만히 서 있으니 알 수 없는 평온함이 그의 몸을 감싸 안았다.

알 수 없는 평온함에 그는 잠시 몸을 맡기며 눈을 감았다.

이제 그는 현재의 자신에서 과거의 자신을 볼 수 있었고 평온함의 비밀을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되었다.

평온함은 익숙함 속에서 낯선 것을 발견하고 그것이 익숙해질 때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자신도 모른 채 스르르 잠에 들었다.

어둠 속에서는 여전히 빗소리가 밤을 깨트리고 있었다.

하지만 잠을 청하고 있는 그의 얼굴은 어젯밤과는 다르게 조금은 평안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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