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여름이어서 화창하지만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고
땅바닥에는 여름이 뿌려놓은 풀잎들이 무성해 상쾌한 느낌을 주었다.
돌담의 표면은 시간이 준 상처들로 거칠어져 있지만 그럼에도 그곳에서 자란 강고하고 완고한
생명력을 지닌 관목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있었다.
그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기묘한 자연과 시간이 만들어낸 건축물이었다.
그 어떤 인조적인 부분을 찾을 수 없고 아무리 기를 쓰고 돌담 가까이 걸음을 걸으며
두 눈을 부릅뜨고 구석구석을 살펴봐도 도리어 자연이 주는 완전함에 기가 죽고 만다.
물론 아주 오래전에는 이 아름답고 단단한 돌담도 인간이 만들어 놓은 작은 편의시설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의 삶을 보강하고 그들의 비밀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만 존재하였던 인공적인 건축물이었던 것이다.
돌 사이사이에는 황토를 발랐을 테고 생명의 새싹은 자리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생의 계절인 봄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생명이 유독 강한 힘을 발휘하는 여름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아무런 새싹도 피우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에는 인간의 본래의 마음처럼 인내심이 결여돼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바심과 노파심은 그 결여된 마음을 헤집고 들어와 끊임없이 불안을 야기시키고 방황을 방조하며
갈등과 불란의 씨앗을 키우게 된다.
혼돈 속에서 태어난 씨앗은 제대로 된 생명이 아니었고 오염된 깊은 우물에서 악취가 나는
죽음의 또 다른 사향(司香) 일뿐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불안정하기에 죽음을 모르고 한 치 앞도 모르기에 불안에 빠지며 인내심이 결여돼있기에
앞서 말했던 모든 단초들을 밟는 것이다.
나는 이 돌담을 따라 걸으면서 지난 시간들이 담아왔던 인간의 불안정한 기억들을 하나둘씩 떠올린다.
그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들을 증오하고 미워하였는가.
얼마나 사악한 흑심을 품고 오욕(汚辱)의 구렁텅이에 빠졌는가.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나는 인간이 저질러온 과오들을 두 눈으로 바라보면서
참을 수 없는 슬픔과 부끄러움을 느끼고는 녹음이 진 그늘을 지날 때에는 한숨을 내쉬며 잠시 돌담에서
고개를 돌려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먼 옛날에도 하늘은 똑같이 이 처럼 맑았을 것이다.
태양빛이 강렬하게 내리쬐고 다른 어딘가에는 풀잎들도 여실히 무성하였을 것이다.
나는 잠시 우수(憂愁)에 젖어서 녹음의 가장자리에서 휴식을 취했다.
관목의 그림자가 내 눈앞에서 살랑살랑 미풍에 흔들거렸다.
나는 이참에 돌담에 등을 바치고 눈을 감고는 잠시 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내면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심연에 집중했다.
이는 단지 인내심을 가지려고 한 것이다.
고요하게 침전(沈澱)되는 마음을 느끼려고 한 것이다.
한동안 나는 머나먼 안개 낀 사란을 바라보는 프리드리히의 그림의 방랑자처럼 근엄한 마음이 되어서
무실(務實)의 희망을 그렸다.
그리하여 나는 잠시 동안이라도 인내하고 보리심(菩提心)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걷기로 했다.
돌담을 따라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걸으면서 지금 내 마음속에서 자리하고 인내하는 마음의 안정이
조금이라도 오래 머물러 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있음을 오래전 인간들이 만들었던 이 돌담을 따라 걸으면서 생각했다.
'일지 > 수필일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은 땅 (10) | 2022.12.09 |
---|---|
수필 일지 - 그냥 수진 (20) | 2022.06.26 |
수필 일지 - 기억의 비탈길 (17) | 2022.06.21 |
수필 일지 - 편지 (8) | 2022.06.19 |
수필 일지 - 만남 (8) | 2022.0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