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보고 싶었다. 오래 만나지 못했다. 잘 있노라니 그것만 고마웠다.
나태주 - 안부 -
일흔이 된 순원은 호두 알 두 개를 움켜쥐고 지압을 하면서 시간을 확인하고자 고개를 들어
벽면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안경은 쓰고 있지 않아 시간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미간을 찌푸려도 흐릿하게 보여서 순원은 한 걸음씩 나이를 걷고 있으니
이제는 눈앞에서 벽시계의 시곗바늘도 침침하게 보여 쓸쓸한 마음이 되는구나.라고 마음으로 속삭였다.
나이를 먹으면 노화도 당연한 것이라고는 해도 막상 젊음이 내 앞에서 춤을 추고 있을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늙음이란 그저 먼 하늘에서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가는 새들처럼 막연하게만 보였는데
이제는 그것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주위를 둘러봐도 당장 내 눈앞에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지금 내가 손에 쥐고 있는 호두알 두 개와
바지에 새겨진 문양뿐 이고 시곗바늘과 같이 조금만 거리를 두고 있는 사물들은 오로지 윤곽만 흐릿하게 보인다.
창밖에서 흩날리고 있는 낙엽도 안갯속에서 움직이는 그림자처럼 보여서 한숨을 푹 내쉬고는 할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안경을 집어 들었고 안경의 알이 두꺼워서인지 안경의 알이 두꺼워서인지 무게가 나갔다.
안경을 쓰면 이제 희미한 안개는 사라지고 초점이 맞는 사진기처럼 벽시계의 시곗바늘이 제대로 보였다.
시계는 2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늘은 구름이 가득하고 그다지 맑지 않아서 순원의 집 안은 어둡게 음예 져 있었다.
쓸쓸한 순원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도 같았다.
순원은 지금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 아들인 경석은 올해로 마흔다섯이고 두 딸을 둔 아버지였다.
그는 전자기업에 다니고 있었고 몹시 바쁜 삶을 살고 있는 터라 본인의 가족들과도 그다지 오랜 시간을 함께
할 수 없었고 이는 그의 아버지인 순원과도 마찬가지였다.
가끔씩 전화가 오긴 하는데 대부분은 형식적인 전화에 불과했고 전화 속에서 들려오는 경석의 목소리는
힘없고 기계적이며 건조해 보였다.
그런 경석이 오늘 오기로 한 것이다.
이틀 전에 전화로 순원에게 주말이니까 오랜만에 한번 방문하겠다고 말한 경석은 평소와 똑같이
무미건조한 말투였지만 그럼에도 순원은 왠지 안도되는 마음을 느끼고 함께 기쁜 마음도 들었다.
그리하여 순원은 벽시계를 계속해서 주시하면서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석이 오기로 한 시간은 3시였다.
그렇게 순원은 그저 시곗바늘이 3시를 가리킬 때까지 호두만을 주무르고 있었다.
마침내 시곗바늘이 3시를 가리켰고 기다림에 보답이라도 해주듯
초인종이 울리고 경석이 박스를 들고 찾아왔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는지 경석에 어깨에 물방울들이 이슬처럼 맺혀 있었다.
"비가 오기 시작했어요. 4시부터 오기로 했는데."
경석은 박스에서 사과랑 고기를 꺼내어서 냉장고에다 정리했다.
그리고는 어깨에 맺힌 이슬은 털어내지도 않고 순원의 집 주변을 잠시 불러보더니
"뭐 불편한 점은 없죠?"
라고 물었다.
순원은 딱히 불편한 점은 없고 가끔씩 외롭다고 했다.
순원의 아내이자 경석의 어머니인 인자는 순원이 일흔이 되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순원은 뼈에 사무치는 슬픔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자신도 마음의 가지를 놓을 수는 없었기에
그동안의 기억들과 함께 마음속에 묻기로 했다.
경석도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서 크나큰 상처를 입었지만 마찬가지로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순원보다도 고통스럽게 기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했다.
경석이 순원의 집에 방문이 뜸해진 것도 어쩌면 이런 인자의 부재에서 비롯된 덧일지도 모른다.
순원과 경석은 이후 몇 마디를 주고받다가 경석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바빠서 오래 있지는 못해요. 오늘은 이만 가보도록 할게요."
순원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되겠니.라고
물어보려고도 했지만 그건 일별의 충동이었음을 느끼고 실제로는 말하지는 않았다.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라."
경석은 순원에게 몇 차례의 인사를 하고 집을 떠났다.
경석이 나간 후에도 순원은 한동안 현관문 앞에 서 있다가 현관문의 불이 꺼지고 집 안이 어두컴컴해지자 불을 켰다.
창밖에서 빗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원래의 자리에 앉아서 호두 알 두 개를 손 안에서 굴리며 지압을 한다.
그리고는 조금만 더 있다 갔으면 좋겠는걸 왜 이리 외로운 마음이 드는지.라고 속으로 말하다가
이윽고 그래 그렇게 바쁜데 와주는 것도 힘든 일이지.라고도 생각하면서 오늘 경석과의 만남을 다시금 생각했다.
빗소리가 울려 퍼지는 집 안에서 순원은 쓸쓸한 마음임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만난 경석과의 짧은 만남을 기억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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