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윤동주 -길-

시간이 지남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등대의 표면이었다.
내가 사는 곳은 남쪽에 위치한 작은 읍이었는데 그곳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단 두 개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읍에서 자란 아이들은 중학교까지 학업을 마치면 저 멀리 도시 쪽으로 고등학교를 갔다.
나 역시도 중학교 때까지만 이 작은 읍에서 등교를 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도시 쪽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지금은 사실상 인구수의 감소로 읍에는 아이들이 거의 없어서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폐교가 되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것이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것은 하나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실의 기억이 내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파문을 그리고 있기 때문인데
결국은 그 기억의 원초적인 병풍(屛風)이라고 여겨지는 학교가 허물어져 사라짐으로써 나의 이러한
파문도 같이 잠잠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나의 크나큰 착각이었고 상실의 늪은 더욱더 나를 깊숙한 곳에서부터 천천히 조여 와서
수시로 나를 괴롭게 하였고 우울증 약이나 심리치료 같은 인조적이고 나에게는 지극히 어려운 치료를
받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런데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이 상실의 늪은 나의 발부터 시작하여 몸통까지 끌어당겼고
이제는 간신히 숨을 쉴 수 있는 얼굴만 늪 한가운데로 고개를 내민 채로 있다.
그런 의미에서 등대의 노화는 나의 대변자로서 작용했다.
오래전, 나는 이 등대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같이 다닌 사랑하는 그녀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등대 주위를 걷고 가끔씩 등대 위로 올라가서 아름다운 등명기(燈明機)를 구경하면서
땅거미가 질 때까지 이야기꽃을 치운 적도 있었다.
지금도 이 같은 행복한 기억들의 파편들을 하나둘씩 마음의 해변에서 주워 담을 때면
마치 어린 시절 호기심 많은 소년이 맵시 있는 조개껍데기나 소라 고동을 발견하고 환희에 차서
살금살금 다가오는 파도 사이를 뛰어다닐 때의 황홀경(恍惚境)에 빠진다.
과거 우리 둘에게 등대는 나와 그녀의 파릇파릇한 젊음의 대변자였으며 당시로서는
거친 바닷속에서도 유연하게 헤엄치는 우직한 해녀들과 뱃사람들이 활발한 읍의 건강의 상징이기도 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기억하면 할수록 지금의 나와 이 등대, 그리고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이제는 속세 속에서 유실(流失)되어가는 읍이 너무나도 쓸쓸하고 어둡게 보인다.
나는 등대 앞에서 섰다.
오랫동안 채색을 하지 않아서 표면에 페인트 껍질이 각질처럼 벗겨져 있고
등대의 금속은 전부 녹슬어서 을씨년스러움을 자아냈다.
날씨가 흐려서인지 차가운 죽음의 잔향이 어딘가에서 죽은 이를 기도하는 향처럼 코끝에서 진하게 피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눈을 감았다.
나는 그때의 과거가 참으로 행복했었으나 그녀는 실제로 행복하지 않았다.
그 점을 나는 모르고 시간이 나에게 그 사실이 현재에 이르러서야 알려주었다.
나는 다시 눈을 떴다.
젊음이 이미 아늑히 먼 곳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머지않아서 이 읍처럼 혹은 등대처럼 녹슬고 벗겨져 바닷바람에 날려 멀리 날아갈 것이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바다로 갔다.
나는 아직도 그녀의 마음을 모른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유일하게 내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그녀의 죽음의 이면을 알아야 나는 비로소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다.
나는 다시금 등대를 바라본다.
동명 기를 구경하고 싶어서 올라가려고도 했지만 전과는 다르게 문이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있었다.
이것은 그녀의 내면의 아픔을 지나친 나의 과오를 탓하는 등대의 꾸지람이 아닐까.
등대는 나에게 말해주고 있다.
사라져 가는 읍도 나에게 말해주고 있다.
그때의 마냥 행복했던 기억들이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결심을 한다.
나는 그 자리에서 메모장을 꺼내어 몇 가지의 글을 적었다.
그리고 그 메모장을 찢어서 등대의 자물쇠의 뒤편에 꽂아 놓고는
뒤도 보지 않고 끊임없이 걸었다.
상실은 기억의 비탈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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