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무나 많은 상념들이 머릿속에서 서로를 추궁하고 물어뜯으면서 나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
원래도 상념들이 흘러넘쳐서 때로는 밤잠을 설칠 때도 있는데 그러면 나는 항상 밤 한가운데 버려진 듯한
쓸쓸하고 적막한 기분에 사로잡혀서 블라인드의 창틈에서 새벽빛이 한줄기 흘러나올 때까지 우수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이 상념이라는 것이 하나하나만 보자면 그다지 성가신 것은 아니다. 인간의 삶이란
모름지기 고민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때로는 그 고민들이 삶의 재미난 원동력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난제에 정면으로 부딪혀 전혀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답을
찾아낸다. 그리고 마침내 환호하며 환희에 차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비로소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절실히 느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적지 않은 고민들은 고마운 존재이다. 적어도 수많은
현대인들의 대다수의 지루한 세상사를 볼 때 이러한 고민들은 더욱 절실해 보이기도 한다. 하나 나 같은
경우는 그 상황이 다르다. 너무 적은 것은 분명 좋지 않다. 반대로 너무 많은 것도 좋지 않다. 고민이 너무
적으면 삶의 의혹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 그러면 점차 자신과 이 세계와의 관계가 악화되고 생에 대한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락의 순간으로 빠져들게 되고 어찌어찌할 새도 없이 한순간에
허망한 최후라고밖에 볼 수 없는 죽음의 늪으로 무기력하게 걸어가는 모습. 그것이 고민이 적은 인간의
슬픈 최후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고민이 너무나도 많아서 과열상태에 이르게 되면 인간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머리를 꽁꽁 싸매고 미간에 주름을 가득 담아서 온종일 매진해도 그 어떤
실마리도 찾을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결국 포기하려고 해도 고민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코 상대를
놓아주는 법이 없다. 어디를 가도 어느 것을 해도 고민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고민이라는 것이
아무리 복잡하고 거대한 컴퓨터의 회로처럼 난해하다고 해도 모든 것은 결국 그 자신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버틸 수도 없게 되어버린 존재는 고민이 너무 없는 존재와 마찬가지로 같은 길을 걷게 된다. 공통적으로 고민으로 하여금 죽음의 늪에 스스로 몸을 던져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 상념들을 떨쳐버리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온
신경을 집중한다거나 자포자기에 이른다거나 한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그래서 나는 이 상념들을
모조리 곤충채집가가 잡아온 곤충들을 정성스럽게 표본을 만들기 위해서 핀을 꽂아서 고정하는 것처럼 내
앞에다 펼쳐서 해부도의 그림처럼 전시해 보기로 했다. 핀을 꽂듯이 천천히 상념 하나하나에 집중하여
정지시키고 자세히 들여다본다. 첫 번째 상념이다. 이것은 미래와 관련이 있다. 다른 것들도 전부다 미래와
관련이 있다. 그런데 과거와도 관련이 있다. 과거와 미래가 현재를 사이에 두고 팽창하고 있다. 현재는
고요하게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있지만 엄연하게 존재하고 과거와 미래를 끊어지지 않게 연결다리
역할을 해주고 있다. 이어서 두 번째 상념, 세, 번째 상념, 네, 번째, 다섯, 번째에 이르기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고요하게 나의 머릿속 낡은 작업실에서 자신의 사상에 몰두하는 학자들처럼 땀이 흐르는지 주변에서
벌레가 기어 다니는지는 전혀 개이치 않고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스물두 번째 상념까지 표본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여전히 상념들은 얽히고설킨 채로 회천초처럼 이리저리 뭉쳐진 채로 굴러다니고 있다.
고통과 피로의 먼지를 휘날리며......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일을 계시한다. 나는 원래 나태한 성격이라서 일을 한번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도중에 포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악습인 것을 알면서도 수년째 그렇게 시작하고 포기하기를 반복하는 나의 삶의 패턴이 어쩌면 이 모래폭풍처럼 나를 덮쳐오는 상념의 무리를
만들어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이 모든 것들은 결국 나의 책임이다. 사실 고민이라는 것의 시작은
항상 자기 자신이다. 타인으로부터 시작되는 경우는 있지만 대다수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자기 자신으로부터 끝난다. 고민이 너무 없는 사람은 고민에 굶주린다. 고민이 너무 많은 사람은 고열에 시달린다.
고민이라는 것의 무게는 어느 정도 일까? 그것들이? 점점 여러 개가 되어서 뭉치다 보면 그것에 깔리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 나는 고민에 대한 무게를 걱정하고 있지는 않다. 지금은 그저 시간이 문제다. 시간.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제한돼 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나 대다수는 간과하고 살아간다. 그러는 편이 삶을 살아가는 데에 훨씬 유리하니까.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나 같은 경우는 그 시간이라는 존재를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다. 분명 다 같이 느끼는 공통존재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시간이라는 것이 일종의 만질 수 있고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으며 귀로 들을 수 있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밤하늘을 보며 산책을 할 때 새벽빛이 우울한 나를 둘러쌀 때 그 시간이라는 존재가 내 눈앞에서
어떠한 형식이든 나타난다. 별다른 것은 없다. 단지 시간은 존재 자체에게 자신이 왔음을 시사할 뿐
그 어느 것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은 버틸 수 없는 고독의 상징이자 허무의 극치이다.
시간이 왔다 가면 허무함은 상념들과 합쳐져서 나를 짓누른다. 고민들이 가진 무게라는 것은 어떠한 상징과 결합할 때 비로소 그 힘이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무게가 언제까지고 나를 고행에 시달리게 한다.
이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나는 이불도 뒤집어쓰지 않고 땀으로 적셔진 베개를 끌어안고 있게 만든다. 날이
밝기 시작한다. 하늘은 새벽의 색과 아침의 색이 결합하여 날씨를 만들어낸다. 구름조각들이 하나둘씩
파란 하늘을 물들이게 되고 건물 창에서는 태양빛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이 얼마나 눈부신 빛깔인가.
가련하게 빛나는 빛줄기들이 도시를 관통하고 도시 사이사이에서 소음이 발생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동하고 횡단보도의 불이 깜박거리고 차가운 바닥은 자동차들의 과속으로 과열되어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지금 세상은 정열의 작열로 이글거리고 있다. 여름은 거의 끝나가지만 여전히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그런데 오직 나 혼자만이 이 차갑게 식은 방 속에서 홀로 시간이 지나간 자리에 머물러 있다. 수많은 상념들에 뒤덮여서 고독하고 싸늘하게 마치 죽은 지 꽤 시간이 지나서 생의 온기가 전부 빠져나가버린 슬픈 주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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