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날 버렸다.
날 버린 이 세상에 내 편이라고는 하나 없이
오직 나 홀로 한 발자국도 디딜 수 없는 이 작은 땅덩어리에서
나는 존재한다.
그 누구도 나를 구원해 주지 않았다.
아니, 구원을 바라기 이전에
그 누구도 나의 존재에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다.
나는 여기 버젓이 서있는데 살려달라고 소리 치진 못하지만
살려달라는 눈빛만은 항상 그들에게 보내고 있었는데,
그렇게 가끔가다 나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저 나를 외면하기에 바빴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존재하는 이 땅덩어리는 그 누구도 초대할 수도 없을 정도로 작았다.
내가 이 땅덩어리를 나가기엔
그 밖은 칠흑같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나는 그런 칠흑 속의 무엇인가가 너무 두려워,
그 알지도 못하는 무엇 때문에 이 땅덩어리를 나의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갔다.
내가 서 있는 땅에서 발을 내딛는 순간 낭떠러지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칠흑 같은 어둠이 무서워 나는 발을 내딛지 않고
그저 이 작은 땅덩어리에 서있을 뿐이었다.
세상은 날 버렸다.
하늘조차 내게 빛을 보내주지 않았고,
믿었던 사람조차 날 외면했다.
나라고 처음부터 이런 작은 땅덩어리에서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남들처럼 그들과 같은 땅에서 살았고 함께 웃고 떠들며 즐거움을 나눴던
때가 분명히 내 기억 속에 소중히 자리 잡고 있었다.
난 왜 이렇게 변한 것일까.
아니, 세상이 날 이렇게 바꿔놓은 것일까.
이 세상은 날 처음부터 가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나와 있기를 원하지 않았고 나조차도 그걸 바라지 않았다.
그저 나라는 존재를 지탱해 주는 건 다름 아닌
언제 무너질지도 모르는 이 작은 땅덩어리 하나뿐이었다.
한때는 여길 벗어나려고도 했었다.
용기를 내어 칠흑 같은 어둠을 해치고 발을 내딛는 순간 거기에는
내가 두려워했던 낭떠러지 대신 또 다른 땅이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별거 없어 처음엔 자신감이 붙었다.
그 자신감에 힘입어 난 걸음에 속력을 붙여 달리기 시작했고
그렇게 달리던 와중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이 보였다.
난 내 눈에 보이는 그 땅으로 가기 위해 속력을 더 내어 달리기 시작했고
금세 그들이 살고 있는 땅에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하도 달려서일까 벅찬 숨을 고르기 위해
손을 무릎에 대고 헐떡이고 있었다.
숨 차오름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나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세상이 얼음장처럼 너무나도 차가웠다.
그들은 날 봐주지 않았고 난 그게 너무 싫어 그들의 눈앞까지 다가가
날 봐달라며 볼품없는 얼굴을 보여주려는 찰나 나는 순간 두려움을 느꼈다.
작은 땅덩어리에 있었을 때 칠흑 같은 어둠을 두려워했던 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공포심이 날 덮쳐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나와 같은 이목구비가 없었으며
난 이들과 함께 할 수 없음을 바로 알아챘다.
내가 그토록 열심히 달려온 그 끝에는 행복한 결말이 있을 줄 알았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으니까,
노력이란 자양분으로 나무를 키우면 그 나무에는
행복이라는 달콤한 열매가 열리는 줄 알았으니까.
그 나무에 열린 열매는 달콤하기는커녕 벌레로 득실거렸고 만지기 위해
손을 대는 순간 열매는 터져버렸다.
나는 상실감을 느낄 새도 없이 나무를 등지고 나를 지탱해 주던
그 작은 땅덩어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언제 무너질지도 모르는 그 작은 땅덩어리가 마치
고향이라도 온 듯 너무나도 아늑하고 따뜻했다.
나를 옭아매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작은 땅덩어리가 마치
예전에 느꼈던 어머니의 품속과도 같아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 뒤로 나는 이 작은 땅덩어리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가끔씩 날 구원해 주러 왔다며 가면을 쓴 악마들이
내게 말을 걸며 위선적인 행동을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내게로 오기에는 내 땅은 너무나도 작았고
그런 악마들이 오면 올수록 내 땅은 그 무게를 못 버티고 점점
추락하고 있었다.
나는 나의 작은 땅이 사라지는 게 두려워 당장 그 악마들을 내쫓았고
이제는 이 땅에 나만이 존재할 수 있었다.
드디어 세상이 날 완전히 버렸다.
아니, 이젠 드디어 내가 세상을 버렸다.
그렇게 위를 올려다보며 내가 버린 세상을 향해 비웃었지만 어째선지
내 몸은 검게 썩어있었고 점점 죽어가고 있음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는 내 작은 땅조차도 점점 금이 가고 있었다.
두려웠다.
이 두려움은 내가 죽어가는 것에서 오지 않았다.
나의 작은 땅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수도 있음에 두려움을 느낀 것이었다.
이 땅이 무너진다면 나의 존재 자체가 무너질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결국에 나는 이 세상에 남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또다시 날 비웃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자 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썩어갔고 나의 작은 땅은
내가 쪼그려 앉아야만 할 정도로 작아져 있었다.
난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
이 땅에서 나와 다시 한번 더욱더 짙어진 칠흑 속으로 떠날 것인지.
아니면 이 작은 땅이 무너져 없어질 때까지 그저 기다릴 것인지.
어떤 선택을 하던 행복은 어디에도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난 후자를 택했다.
그저 땅이 무너져 없어지기를 기다렸다.
나의 작은 땅이 나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일까.
나의 작은 땅은 처음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금이 가더니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는 땅이 무너지기 시작하니 나도 이 작디작은 땅과 함께 떨어지겠구나
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땅이 다 무너지고 이제 발을 디딜 곳조차 없어지는 순간
목이 순간 조여 오더니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정신이 점차 희미해져가는 순간 옛날 기억들이
하나, 둘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 기억 속의 나는 너무나도 밝은 얼굴로 해맑게 웃고 있었다.
마치 슬픔, 걱정, 분노 등 날 옭아맸던 감정들을 한번 도 느껴보지 못하고 이런 단어들조차 들어보지 못한 아이처럼 예전에 느꼈던 햇빛 보다 더욱더 따스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햇빛을 등졌다.
그러고선 나에겐 햇빛이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순간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칠흑 같은 어둠이 무서워도, 나와는 다른 그들이 무서워도
그저 용기 내어 한 번 더 발을 내디뎌 볼 걸이라며 한탄했다.
하지만 더 이상 의식을 붙잡을 수 없었고 나는 끝을 맞이하려는 때에
내 귓가에 사람들의 비명과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듣고 싶었던 사람들의 소리와 그렇게 느끼고 싶었던 사람들의
온기를 이제 서야 느낄 수 있었다.
세상은 날 비웃기라도 하는 듯 이제 서야 날 가졌다.
세상은 처음부터 날 가지지 않았었고 그렇기에 날 버린 적조차 없었다.
버린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이제라도 날 가져준 세상이 너무 나도 고마웠다.
그것의 온기가 너무 나도 따뜻했다.
그 무엇도 이보단 날 따뜻하게 녹일 수는 없었다.
그런 따스함을 느낌과 동시에 방금까지 들리던 사람들의 소리와
사이렌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내가 그렇게 혐오하고 한편으로는 두려워했던 세상에게 나는 지금 가고 있다.
아무리 넘어져도, 떨어져도, 실패해도, 낙담해도 다신 한번 날 안아줄 세상이 있기에 난 걱정 하지 않고
세상에게 뛰어가고 있다.
이젠 세상은 나를 가졌고
나 또한 세상을 가졌다.
'일지 > 수필일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필 일지 - 거대한 소리 (12) | 2023.01.30 |
---|---|
수필 일지 - 물결 (12) | 2023.01.29 |
수필 일지 - 그냥 수진 (20) | 2022.06.26 |
수필 일지 - 돌담 (10) | 2022.06.22 |
수필 일지 - 기억의 비탈길 (17) | 2022.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