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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수필일지

수필 일지 - 그냥 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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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감각을 흔들어 주었다

 

김광섭 -생(生)의 감각-

 

 

 

 

 

효진이라는 아이가 이승에 머물던 시간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의견을 내겠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정확하게 3625초였다.

그녀는 출산 후 2분이 경과했음에도 호흡을 전혀 하지 못했고

이후 10분이라는 시간이 넘게 지나도 심장박동수가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결국 2425초가 지나고 효진은 결국 사망 판정을 받았다.

효진의 어머니였던 오연은 태어나 지금까지는 겪지 못한 종류의 고통을 느꼈고

출산의 고통의 후유증이 다 사라지기도 전에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그녀의 생명의 열기를 완전히 차갑게 적셔버렸다.

그녀의 남편이자 이 모든 고통의 순간들을 같이 목도(目睹)한 우진 역시도 더 이상 앞으로의 미래를 바라보기가 두려웠다. 앞으로 한 걸음만 더 걸어도 발을 헛디뎌서 영원히 보이지 않는 틈새로 떨어져 추락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는 오연도 마찬가지여서 우진은 그런 오연의 쓰러지는 몸을 잡아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만약 우진이 그녀를 잡아주지 않는다면 그녀는 우진보다도 더 빠르게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으로 추락할 것이기에.

그런 상황에서 한동안 둘 사이에 일상적인 대화는 존재할 수 없었다.

오연은 베란다에서 우진은 거실의 소파에서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있을 뿐, 그 어떤 일도 하지 못했다.

집 안은 항상 음울한 슬픔만이 가득했다.

우진이 무의식적으로 틀어놓은 텔레비전의 우스꽝스러운 코미디 프로그램의 경박한 소리에 섞여서

음울함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피폐한 소음들은 그들의 귀에는 전혀 들리고 있지 않았다.

이렇듯 그들의 생활적인 움직임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이따금씩 생명의 유지를 위해서 우진이 무거운 몸을 일으켜

텔레비전에서 송출되고 있는 방송을 끄고 옷을 입고 장을 보러 문으로 향할 때면 오연이 초점 없는 두 눈으로 고개를 돌려서 말을 전혀 하지 않아서 깊은 우물처럼 잠긴 목소리로

우유도 사와 줬으면 좋겠어.”

라고 한마디 했다.

우진은 약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문을 나갔다.

그러면 이제 완벽한 적막이 오연과 함께 남게 되는 것이었다.

슬픔의 구체화, 그것은 우진과 오연에게 절실히 다가왔다.

그리고 그 구체적이고 살을 찌르는 듯한 슬픔은 죽음보다도 괴롭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할지 죽음의 고통을 피해서 계속 살아가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둘이 죽음을 선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에게서 효진을 데려간 죽음을 증오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오연은 만약 고통에 절망하여 죽음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효진에게 크나큰 상처를 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우진은 죽음을 맞이하면 고통에서 해방될지는 몰라도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이제 유일하게 사랑하는 오연마저도 잃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둘의 상반되지만 본질적으로 죽음을 해답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결과론적으로 그 둘을 하나로 묶게 만들었고

그 결과 그들은 효진의 49재 때에 이르러서야 하나의 답을 도출해내는 데에 이르렀다.

시간이 이렇게 안 갈 줄은 몰랐어.”

나도....”

효진은 어떤 아이였지?”

그 아이는 그저 효진일 뿐이야.. 어떤 아이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 맞아

그들은 끝내 타협하지 않도록 했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 즉 생명의 줄기를 놓치지 않고 거친 슬픔의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효진은 특별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녀가 죽은 것은 어떠한 특별한 하늘의 시련이나 사명 같은 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적인 비극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이 사실은 그들에게 오히려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그들을 다시금 생명과 순환의 바다로 밀어서

그들을 다시금 움직이게 만들었다.

효진은 그냥 효진일 뿐이다.

그 사실이 그들에게는 소중한 사실이었다.

49재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면서 오연과 우진은 같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저물어가는 태양 속으로 천천히 걸어가면서 아주 잠시 동안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구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찰나의 순간에 눈을 감고 그들에게 주어진 일별의 어둠을 잠자코 음미하였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들에게는 새로운 삶, 새로운 생명의 흔들림이 봄에 찾아오는 미풍처럼 그들의 생()을 흔들었다.

생의 흔들림 속에서 그 둘은 다시 걸었다.

하지만 이 소생의 흔들림 속에서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여전히 효진이 다시 한번 불꽃처럼 타올라서 눈앞에

나타나 주기를 바라는 일말의 희망이 신앙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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